[건두부] 녹슨칼
※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시기 전에 주의해주세요
※ 작품에는 텍스트 고어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당하는 소재를 보지 못하신다면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 개인적인 해석이 다분하며, 작가님의 전작품인 '친애하는 폭군에게' 언급이 다소 존재합니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도금이 벗겨진 칼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칼이다.
-녹슨칼 4권-
기본 정보
제목: 녹슨칼
작가: 건두부
출판사: 메어리로즈
등장인물
1. 히더린 비체 (히더린 파르마사 생 롯사- 비체)
왕의 동생이자 평생을 검으로 살아온 근위 대장.
기사에게 '자아'란 주인의 명령을 의미한다. 자신의 출생에 의문을 가지던 히더린은 부모님이 돌아가시자마자 체사를 왕위에 올리고 스스로 검을 자처했다. 히더린은 왕의 검이었으며 왕이 휘두르는 대로 기꺼이 몸을 던진다.
그렇게 한평생 일생을 던져 검으로 살아오던 히더린은 결국 체사에 의해 성녀를 살해하려고 했다는 누명이 씌워지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히더린 비체.
히더린 비체!
히더린 파르마사 생 롯사-비체! 당장 일어나!
-녹슨칼 1권, 4권 중 성녀가 죽은 히더린을 깨우는 대목-
2. 사르그 글로리오사 (삭)
대대로 성기사 단장을 배출해 내는 글로리오사 공작가의 후계자이자 성녀의 호위로 활동하는 성기사.
고귀하고 바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들은 사실 본인의 비천한 출생으로부터 비롯한 열등감을 숨기려는 사투의 결과물이었다. 그의 출신은 평민이었으며, 성녀인 여동생의 덕으로 글로리오사 가문의 양자로 입적하는 기회를 얻었다.
이후, 처음 만나 대련을 하게 된 히더린을 짝사랑하게 되었으며, 히더린이 누명으로 사형에 선고받을 때 히더린의 무고를 끝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사형을 당했고, 사르그는 조작 당했을 배후를 쫓았다. 끝내 그 배후에 왕이 있음을 짐작한 그는 왕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가진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산속으로 들어가 폐인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사람에게는 낙인이 찍혀있다.
인생의 어느 순간마다 네 삶의 궤적은 중요하지 않아진다.
그때가 찾아들거든 사람들은 오로지 네 이마에 찍힌 낙인으로 너를 평가할 것이다.
-녹슨칼 3권 중 글로리오사 공이 사르그에게 한 말-
3. 체사 (체사 비스레티오 생 롯사)
히더린의 동생이자 롯사의 왕.
어릴 때는 유약한 성정이었으나, 선왕 부부가 사망한 당시, 나약하게 굴지 말라는 히더린의 강압적인 명령에 의해 왕의 냉정한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원하지 않는 왕의 자리를 압박 속에서 억지로 떠맡았고, 상실을 받아들이기 전에 슬픈 감정을 버렸어야 했다. 그는 손 윗누이인 히더린을 원망했고, 기사로 맹세한 히더린을 입맛에 맞게 사용했다.
이후 예언자로부터 피가 이어진 여성에 의해 사망한다는 예언을 듣고 난 뒤, 히더린에게 성녀 시해 누명을 씌워 사형을 선고하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딸까지 죽이다가 왕비인 마가리테에게 들키고 만다.
모두가 체사에게 왕이 되기를 종용했다.
체사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도움을 요청하듯이 히더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히더린은 그 시선을 외면했다. 동생이 느낄 압박감을 짐작했지만, 그것을 덜어 내 줄 수는 없었다.
왕이 되어야 하는 건 체사였다.
-녹슨칼 1권 중 체사의 과거 회상 대목-
4. 마가리테 (맥)
성녀.라고 알려져 있는 마녀.
왕의 열렬한 구애를 받았으나 자신의 불안정한 과거 탓으로 여러 번 그 청을 거절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피했지만 왕의 명령을 받은 히더린에 의해 자라온 거리가 쑥대밭이 되고 말 없는 협박들로 인해 결국 왕과 결혼을 하게 된다.
앞선 이유로 히더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히더린이 자신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녀를 증오하기에 이르렀지만 체사가 자식들을 죽이는 장면을 몇 번 목격한 뒤로 체사를 무서워하며 복수를 꿈꾸게 된다.
그러던 도중 마가리테는 예언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 예언을 이뤄줄 히더린을 무덤에서 살려 황제의 죽음을 의뢰한다.
어떤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잊히고 희미해지더라도, 여전히, 그 자리에 매여 있다.
그녀는 여전히 많은 것들을 미워했다.
-녹슨칼 4권 중 마가리테의 속마음-
감상평
1. 전체적인 글의 느낌
이 작품은 비슷한 문장을 반복합니다. 분명 다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장면 묘사로 인해 데자뷰라는 반가우면서도 기묘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요. 물론 이런 요소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싫어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반복되는 부분마저도 작가의 의도로 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지루하지 않았고 좋았습니다.
다만, 단점이 있다면 작품 전반적인 서술이 무거워서 대중적이지 않다는 점과 초반과 중간중간 등장하는 장면들이 그로테스크하다는 점입니다. 서술이 무거운 부분은 제 취향에 들어맞아서 괜찮았으나, 텍스트 고어를 보면 공감 통증이 생기는 저로서는 해당 내용들에서 조금 힘들었어요. 작가님의 믿고 보는 필력과 뒤의 내용에 대한 궁금증 덕분에 그 장면들을 버티고 넘어섰습니다.
※ 이 아래부턴 작품을 보지 않으신 분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2. 좋았던 문구들, 개인 해석
1) 건두부님은 항상 제가 표현하지 못해 마음속에 간직하고만 있던 감정들을 글로 표현해 줍니다. 전작인 '친애하는 폭군에게'에서는 바다에 대한 이야기가, 이번 작품에서는 죽음에 대한 내용들이 그 내용에 해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혜택ㅡ절대 숙면에 상당히 만족하는 편이었다.
그녀는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영원한 잠을 자고 싶었다.
해당 내용은 '바다'와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면을 보여줍니다. 보통 사람들은 현실도피를 하고 싶을 때,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저는 '어디론가'가 흔히 바다와 죽음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바다를 가고 싶다고 할 때마다.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저는 그들이 정말 바다를 보고 싶다거나 죽음을 갈망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휘몰아치는 일상 속에서 자그마한 휴식을 얻고 싶어한다고 봐요. 때문에 저는 히더린 비체가 원하는 것이 막연한 '죽음'이 아닌, 아무 생각 없이 혼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2) 작가는 작품에 자신의 가치관을 담습니다. 건두부 작가님은 그것이 '상실'처럼 보였어요.
상실이란 그와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
어떤 것들은 결코 다시 재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친애하는 폭군에게-
체사는 상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
-녹슨칼 1권-
어떤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잊히고 희미해지더라도, 여전히, 그 자리에 매여 있다.
전 작품인 '친애하는 폭군에게'가 주인공들이 상실을 받아들이는 내용이라면, '녹슨칼'은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이끌어 나가는 이야기로 보였습니다. 상실을 인지하고 끝없이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은 끝내 앞으로 나아가지만,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은 제자리를 걸으며 살아갔습니다. 체사는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 상태에서 받아낸 억압으로 인해 어디 한구석이 망가져버려 결국 제 핏줄마저 죽이게 되고, 히더린을 잃은 상실을 견디지 못한 사르그는 술을 수단이 아닌 목적을 위해 마셨고 고행이 아닌 쾌락을 위해 마시는 사람이 되었으며, 자신의 인생을 상실하고 체사와 결혼한 마가리테는 끝내 체사를 죽이기 위해 금단의 영역에 손을 대었고, 히더린에게서 영원한 안식을 앗아갔습니다.
상실은 고통스럽고 믿을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상실을 받아들일 때 결국 성장합니다. 그 고통을 인내해야 앞에 피어 있는 클로버들을 볼 수 있어요. 이것을 인내하지 못하고 외면하면 사라지기는커녕 발목을 잡아 구렁텅이로 끌고 갑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인데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들이잖아요. 과장된 해석일지도 모르지만, 이 작품이 온전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했던 이유와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나아갈 수 없어요. 녹슨칼 주인공들은 상실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3) 제가 글을 읽으면서 가장 공감하고 좋아했던 문구가 있습니다.
시간이란 기묘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어떤 것은 선명하게 만들고 어떤 것은 더욱 흐리게 만든다.
읽으면서 정말로 공감이 많이 갔던 글귀였습니다. 흔히 다들 시간이 약이라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억은 사라지지 않은 채, 가끔 불쑥 저를 찾아와 머리와 심장을 잔뜩 어지럽히곤 또다시 숨어버립니다. 건두부님은 항상 제가 표현하지 못해 마음속에 간직하고만 있던 감정들을 글로 표현해 준다고 했잖아요. 이 부분 또한 그런 내용 중 하나였습니다.
인물의 관계성
1. 히더린과 사르그
-> 한 줄 평 : 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과 자신의 존재가 그 인생에 너무나도 큰 아픔으로 자리 잡길 바라지 않는 사람
두 사람은 맞 짝사랑입니다. 그럼에도 히더린이 사망하기 전, 두 사람이 풍기던 분위기는 애정보다 혐관이라는 생각이 더 들었어요. 작품이 진행되면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비추고 그들의 성정을 보다 보니 왜 저런 분위기가 나왔는지 알 것도 같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은 사랑을 했어요. 진심으로.
히더린은 12주만 살 수 있는 시한부입니다. 사르그는 히더린이 없으면 이성도 없는 폐인이 됩니다. 딱 봐도 해피엔딩처럼 보이지 않는 이야기 속에서 모든 일이 끝나고 알콩달콩 여행을 떠나는 모습은 평화로운 광경임에도 불안했습니다. 그 와중에 히더린이 꺼낸 말은 진짜 슬펐습니다.
"사르그. 부탁이 있어."
"면도 꼬박꼬박 잘 해. 머리는 꼭 기르고."
"술도 마시지 마. 금주해."
"너무 오래 슬퍼하지도 마."
"네 삶을 살아.
히더린은 자신이 죽더라도 사르그가 건강하고 제대로, 자신의 삶을 살길 바랍니다. 그러나 사르그는 히더린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작품 초반에 보여줬어요. 히더린과의 약속으로 면도를 하고 금주하고 멀쩡하게 작위를 이어받겠지만 사르그가 괜찮아질 것 같진 않았습니다. 속은 문드러진 상태로. 그저 그렇게 약속만 이행한 채로 살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거대한 슬픔을 꾹 내리누르고 그 위를 담담함으로 채워 넣은 기분이었습니다.
체사도 왕비 전하도 혼자는 외로울 테니.
네가 왕비 전하 곁을 지켜
원했던 결말은 아니었어요. 두 사람은 결국 자신의 혈육 곁에 남기로 결정했고, 그걸 보다 못한 마가리테가 히더린을 다시 살렸으며, 그동안 남겨진 채로 히더린을 그리워한 사르그가 죽고 난 뒤, 상황이 역전되어 남겨진 히더린이 사르그의 무덤 앞에서 슬퍼하는 이야기는 결코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없었습니다. 히더린은 안식을 뺏겼고 사르그가 없는 현실에서 계속 살아가니까요. 그럼에도 그 결말이 이 둘에게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딘가 비틀려있는 자들의, 어딘가 완전하지 못한 결말이요.
2. 히더린과 마가리테
-> 한 줄 평: 증오하는 스승.
히더린과 사르그의 서사는 로맨스와 코미디, 그리고 서로밖에 없는 일명 '그사세'였다면 히더린과 마가리테의 관계는 그것보다 더욱 복잡해 보였습니다. 히더린은 마가레트에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고 마가레트는 히더린을 증오했음에도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니까요. 자신을 나락으로 밀어 트린 장본인을 살린 데다가 마지막에 했던 히더린의 선택을 확인하고 마가레트는 마치 제자처럼 그 뜻을 이어받습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애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마가리테가 히더린을 싫어한 것에 비하면 히더린은 마가리테에게 나쁜 감정은 아니었습니다. 늘 그녀에게 빚을 진 듯 죄책감이 있었고 그에 대해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히더린은 마가리테의 복수해달라는 말에 그대로 따랐고, 복수를 끝내고 난 뒤에는 미련을 버렸습니다. 이 행동은 모두, 무엇을 하든 마가리테에게 한 잘못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히더린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리테는 히더린이 자신의 예상을 빗나가자 그제야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평생 남의 것을 갈취하며 살아왔던 비체 백작도 미련 없이 떠났건만,
내가 남의 것을 갈취할 수는 없어...
그 어떤 피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대로 살아갈 수 있다.
히더린이 왕녀로 살다 떠나갔고, 사르그가 성기사로 살아왔듯
마가리테는 마지막까지 히더린보고 싫다고 말했지만, 히더린의 행동은 마가리테가 가야 할 방향의 나침판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것은 마가리테의 행동에서 엿볼 수 있었어요. 그녀는 히더린이 남의 생명을 갈취하지 않은 행동을 따라 제 능력으로 타인을 갈취하는 대신 베풂을 선택했고, 출생이 비천하더라도 왕녀로 살아간 히더린처럼 성녀처럼 살아가기를 결심합니다.
저는 이 모습이 마치 스승과 제자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앞길을 지도해 주는 스승과 스승의 행적을 따라 제 일상에 적용하는 제자. 마가리테는 히더린을 증오했습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히더린이 가장 원하는 안식을 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그저 증오라고 하기엔 마가리테는 히더린의 행동을 보고 배우며 좋은 모습은 답습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 때문에 저는 메인 커플링인 히더린과 사르그 커플링의 이야기도 좋아하지만, 이 둘의 이야기도 상당히 좋아하는 편입니다.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관계들이, 캐릭터가 아닌 정말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마지막으로...
작품을 읽고 나서 한동안 넋이 빠져 있었습니다. 덕분에 리뷰를 써야 하는데도 자꾸 사르그랑 히더린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어요. 그만큼 여운이 많이 남았던 작품입니다.
처음엔 이렇게 끝내야만 했나.라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히더린이 잘못 한 건 맞지만 권선징악의 느낌보단 마가리테의 분풀이 같았거든요. 저는 떠난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들이 더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어서 그런가, 마지막에 남겨진 히더린이 너무 불쌍했습니다. 사르그도 몇 년 동안 죽은 히더린의 무덤 앞에서 죽치고 살았다지만 히더린은 어찌 보면 영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그 상황에 처했으니까요. 그래서 조금 히더린에게 너무하단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직도 그 부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남겨진 히더린이 불쌍합니다. 그래도 이런 결말이 '녹슨칼'에선 최선이었다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어요. 이것은 선과 악의 구분이 없는 작품이었고, 그렇단 의미는 결국 히더린에 대한 처분이 권선징악은 아니었다는 뜻이니까요. 결국 마가리테 개인적인 복수가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친폭은 왕궁 정치 면모가 강했다면 녹슨칼은 개개인의 복수극이라는 느낌이 강했어요. 그렇기에 인물들 사이의 서사들이 질척이고 끈끈하게 얽혀 있다는 감상이 들었습니다. 관계성을 잡고 말하라고 하면 하루 종일 입을 털 수 있을 정도로. 감상할 것도, 그리고 마음에 와닿는 장면도 많았던 작품입니다. 여전히 할 말은 많고 못한 말도 많지만, 말이 많으면 지루하기 마련이잖아요. 이 작품은 이렇게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녹슨칼 봐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